1500년 역사가 살아있는 금산으로의 여행
금산 미륵사석조는 일반적인 테를 갖고, 남쪽 상단부에 낙수홈대를 마련하였고 내부 바닥 가운데에 물을 빼는 배수구멍이 있다. 낙수홈대는 밖으로 돌출되게 만들었고, 동쪽 벽의 위쪽을 오목하게 파서 물이 넘치지 않게 흘러 나가도록 하였으며 동쪽 벽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있다. 길이 237㎝, 너비 150㎝, 내면 깊이 55㎝이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원정사는 원래 하신리 온양 이씨 어필각(溫陽李氏御筆閣) 인근에 있었으나, 일제시대 때현재의 위치에서 약 100m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가 1982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내부에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의 뒷칸에 불단(佛壇)을 조성한 후, 신안사(身安寺)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는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을봉안하고 있다.정면 3칸에 달려 있는 창호(窓戶) 중 특히 중앙칸의 창호는 정교한 쌍여닫이 연꽃살문으로 처리하여 많은 정성을 들인 것이다. 건물구조는 길게 다듬은 돌로 된 기단(基..
금산 용화리 고인돌이 있는 자리는 구릉성(丘陵性) 산지인 아랫말 뒷산 언덕으로서, 용화들과 용강(龍江)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이다. 남북으로형성된 구릉을 따라 3~8m가량 거리르 두고 3기가 일렬로 모두 덮개돌만 놓여 있다. 덮개돌의 형태는 타원형 또는 직사각형이며 크기도150~280cm내외로 비교적 작은 편이고, 부근에서 20여 점의 돌칼과 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곳이활터로서 정자(亭子)가 있었으며, 일제시대까지도 수 백년된 느티나무가 있어 놀이터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한다. 이 고인돌이 있는 자리는 일용골 마을 뒷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낮은 구릉성(丘陵性)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용화리에서 흘러 내려오던 금강의 물줄기가 이 구릉을‘S’자 형태로 휘어돌아 충청북도 영동쪽으로 빠져나가면서 금산읍에서 나오는 봉황천과 천내천이 합류하고 있다. 구릉의 정상 능선을 따라 고인돌이 3~4기씩 길게 늘어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모두 12기가 확인된다. 덮개돌은 사각형(四角形) 또는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200cm 안팎의 크기로, 주변에서 돌칼, 돌화살촉, 붉은색..
탑선리 석탑은 금산읍 중도리 탑선 마을에 있는 석탑으로, 탑 부근에 사찰(寺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고증할 수는 없다. 탑은 3층으로길이가 220cm정도이고, 탑의 규모에 비해 기단이 높은 편이며, 각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약간 훼손된 상태이다. 받침돌과 지붕돌이 반전된 모양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추정되나, 오랜 세월이 지나 허물어져 있던 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세웠다.
탑은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사리(舍利)를 봉안할 목적으로 만든 건축물을 일컫지만, 넓게는 승려(僧侶)의 사리를봉안한 것도 포함된다. 이 탑은 금산읍 아인리 금산산업고등학교와 금산동중학교 사이에 있는 높이 200cm의 3층 석탑이다. 받침돌에 비해서 지붕돌과 몸돌의 규모가 작은 편이고, 2층 몸돌이 없는 상태에서 1층 지붕돌 위에 2층 지붕돌이 얹혀 있는 상태이다. 주변에서‘금귀대덕(金貴大德)’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 ‘대덕’은 신라시대에 스님을 높여 부르던 말이며, 고려시대에는 승과제도(僧科制度)에 따른 서열(序列)..
남원 양씨(南原 梁氏) 문양공 눌재 양성지(文襄公 訥齋 梁誠之) 선생을 배향한 사우로서, 평촌리 귀래봉(歸來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눌재 선생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신으로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5대 40여 년간에 걸쳐 벼슬하며 집현전 학사,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맡아 빛나는 공적(功績)과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선생의 6세손인 천음 응해(天蔭 應海)가 이곳에 정착하여, 귀암사숙(龜巖私塾)을열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1933년 이 사숙의 터에 눌재 선생의 높은 학문을 우러러 사모하여 유림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1922년..
밀양 박씨(密陽朴氏) 눌재 박증영(訥齋朴增榮), 강수 박훈, 퇴우당 박사현(退憂堂朴嗣賢) 세 분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이다. 눌재는 예종과 성종때의 문신으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공로가 컸고, 아들 강수는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禍)를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분이며, 강수의 손자 퇴우당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重峰趙憲)의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전사한 충신(忠臣)이다. 이 세 분의 충절과 공훈을 우러러 사모하여 1961년에 유림과 후손들이 사우를 짓고 매년 봄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건물은 15평에..
의병승장(義兵僧將) 영규대사(靈圭大師)가 머물던곳으로, 보석사 대웅전(寶石寺大雄殿)의 왼쪽 옆에있는 건물이다. 대사는 공주 계룡면 출신으로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와 보석사를 왕래하면서 수도(修道) 생활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중봉조헌(重峰趙憲) 선생의 의병과 힘을 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한 후, 1592년 8월 18일에 금산에 주둔하던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의선각에는 창녕위 김병주(昌寧尉金炳疇)의 글씨로된‘의선각(毅禪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건물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보석사 ..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霽峰高敬命)선생이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순절한 사실을 새긴 비이다. 선생은 1558년 (명종13년)에 문과에 장원한 후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에 이르렀는데, 서인(西人)이 몰락할 때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光州)에서 모집한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1592년 7월 10일에 금산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우다 눈벌(臥隱坪)에서 전사하였다. 효종 때 금산군수 여필관(呂必寬)이 비문을 지어 선생이 전사한 곳의 건너편 산기슭에 순절비(殉節碑)를 세웠으나, 1940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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